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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가 🖋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by LINHEE 2021. 7. 15.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연주자라면 반드시 연주해야 하는 작품이 있습니다. 음악 중고등학교나 음악대학을 가기 위해 입시를 치를 때와 경연에 나갔을 때 늘 지정곡으로 나오는 작품이지요. 바로 <24개의 카프리스>라는 곡입니다. 직접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이 작품의 작곡가는 바로 니콜로 파가니니입니다. 바이올린 연주자에게 평생의 숙제를 안겨주고 떠난 최고의 테크니션, 파가니니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파가니니의 일생

19세기의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태어난 파가니니는 7세에 그의 선생님을 능가하는 바이올린 실력을 보이며 음악에 두각을 나타내었습니다. 아들의 재능을 알게 된 아버지는 파가니니에게 하루 10시간씩 연습을 시켰지요. 그를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 음악가로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파가니니가 13세가 되던 해. 그는 큰 공연장에서 연주를 마치고 엄청난 호응을 얻습니다. 게다가 어린 나이임에도 바이올린 연주만으로 큰돈을 벌기도 했다는데요. 이처럼 어려서부터 많은 사람의 동경을 받고 큰 인기를 얻었던 탓에, 그의 콧대는 하루가 멀게 높아졌습니다. 더군다나 어릴 적부터 큰돈을 벌었던 파가니니는 경제관념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연주로 벌어들인 돈을 전혀 모으지 않고 흥청망청 써댔습니다. 나중에는 결국 빚까지 지게 되어 자신이 연주하던 바이올린을 팔아버리는 지경까지 이르렀답니다. 악기가 없는 연주자라니 참 아이러니하죠.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파가니니의 연주를 사랑했던 한 후원자가 나타납니다. 그는 파가니니에게 바이올린의 명기중 하나인 과르네리(17세기 이탈리아 바이올린 제작가)가 만든 바이올린을 선물했습니다. 파가니니 외에 다른 연주자가 이 바이올린을 사용하지 않는 조건이었다고 합니다.

이 바이올린은 현재까지도 이탈리아의 제노바 시청에서 보관하고 있는데요. 계속해서 꾸준하게 관리를 해왔던 덕에 여전히 좋은 소리가 나도록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후 파가니니는 20년동안 이탈리아 전 지역과 독일, 영국, 폴란드, 파리에 거쳐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무대를 넓혀갔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파가니니의 초절정 기교와 천재적인 재능에 넋이 나간채 환호했다고 하는데요. 당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 파가니니의 스타일'이라는 패션이 유행하여 많은 이들이 그가 입는 옷, 구두, 모자 등 모든 것을 따라 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단지 음악가가 아닌 당대의 아이콘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는 동시대에 함께 활동했던 작곡가 리스트, 쇼팽,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슈베르트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주었습니다. 피아노 연주로 유럽인들이 마음을 빼았았던 리스트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파가니니와 같은 연주력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바이올린을 한다면, 나는 피아노에서 파가니니가 되겠다."라는 다짐을 하며 엄청난 테크닉을 가진 피아니스트가 되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러시아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라흐마니노프는 파가니니 작품의 선율을 사용하여 멋진 작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파가니니는 왼손 피치카토 ( 손가락으로 줄을 마구 뜯는 주법) 하모닉스 (줄에 손가락을 살짝 얹어서 내는 주법) 더블스탑(두 개 이상의 음을 동시에 내는 주법)등의 주법을 사용하여 연주하였는데요. 그 수준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 번은 연주 도중 줄이 하나씩 끊어지는 바람에, 바이올린의 현이 4개 중 한 개만 남아있던 적도 있었는데요 그는 그 한 줄의 현만을 가지고 완벽하게 연주를 마쳤다는 일화가 있기도 합니다. 그의 뛰어난 연주 탓에 프랑스의 황제였던 나폴레옹 1세의 여동생이 기절하기도 했다고 하니 도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던 건지 가늠이 안되네요. 파가니니는 한 번 공연할 때마다 당시의 금액으로 2천 프랑의 보수를 받았습니다. 이 금액은 현재의 가치로 1억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자신의 음악이 영원히 기록될 수 있는 악보 출판에는 아주 소극적이었다고 합니다. 사업상 비밀이기라도 한 것인지, 자신의 연주법이 공개되는 것을 무척 꺼렸고 제자 또한 한 명밖에 두지 않았지요. 이와 같은 이유와 상상을 초월하는 연주력 탓에 파가니니를 향한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가 악마와 계약을 했다는 것이었지요.

그렇다면 과연 정말로 파가니니에게 악마가 깃들였던 것일까요?

이 소문은 파가니니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병상에 누워있을때 더욱 사실처럼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병상에 있던 파가니니가 약을 먹고 취한 채로 "악마가 내 악기와 활에 있다"라는 헛소리를 한 것 때문이었지요. 이것은 그가 사망한 후에 더욱 일파만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랬는데요. 당시 유럽은 가톨릭 교회법으로 결혼과 장례식이 이루어졌습니다. 사망한 후에 개인 소유의 땅에 묻힌다면 교회의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지만, 공동묘지에 안치하려면 교회의 허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큰돈을 벌었던 파가니니는 개인의 땅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한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연주 때도 꼭 같이 다닐 정도로 아들사랑이 극진했다고 함)은 아버지가 교회의 묘지에 잠들어 천국으로 가기를 바랐지요. 바로 이때 교회에서 파가니니의 안치를 거부한 탓에 그의 악마설이 더욱 불거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파가니니의 안치를 거부한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요. 바로 금전적인 문제였습니다. 파가니니의 생전에 교회의 주교(갈바니 주교)가 그에게 큰 액수의 돈을 기부해 달라고 요청했는데요. 파가니니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며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에서는 임종 직전 파가니니의 고해성사(가톨릭 교회에서 임종 전에 보는 성사) 또한 거절했다고 합니다. 교회의 반대로 다른 곳에 안치되었던 파가니니는 사망 후 무려 46년이 지나서야 이탈리아 제노바의 파르마 공동묘지로 이장될 수 있었답니다.

현재 파가니니의 묘비에는 이런 문구가 씌여져 있다고 합니다. "제노바 태생의 천재 음악가, 니콜로 파가니니 여기에 영면하다."

파가니니는 엄청난 연습벌레였다고 합니다. 하루 24시간중 7시간은 기본으로 바이올린을 연습했지요. 그가 일생을 바쳐 작곡했던 모든 곡은 전부 바이올린만을 위한 작품이었습니다. 대표 작품으로는 6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캄파넬라), <24개의 카프리스>, <베니스의 카니발>, 바이올린 소나타 6번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