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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가🖋 - 영국 음악의 자존심 헨리 퍼셀

by LINHEE 2021. 7. 19.


바로크 시대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영국 음악의 자존심이라 할 만큼 짧은 생애 동안 다양한 장르에 걸쳐 엄청나게 많은 곡을 남겼다 퍼셀은 1659년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에서 음악가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작곡가이자 웨스트민스터의 성가대장이었고, 어머니는 성악가인 음악가 집안이었다. 퍼셀은 여덟살때부터 가곡을 쓸 만큼 재능이 풍부했는데, 후대에 등장하는 모차르트에 비견 될 만큼 대단한 음악의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음악가인 부모는 퍼셀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러나 퍼셀이 5살이던 1664년에 퍼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가 죽은 뒤 퍼셀은 궁정 예배당의 일원인 삼촌 토마스 퍼셀에게 맡겨지게 된다. 삼촌은 퍼셀이 10살 때인 1669년 왕실 교회 소년 성가대에 넣었다. 그곳에서 퍼셀은 왕실 성가대장 쿠크와 후임자인 P. 험프리로부터 유럽의 새로운 음악 양식에 대해 배웠다. 1673년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변성기를 맞은 퍼셀은 소년 성가대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집안이 어려워 무슨 일이든 해야 했는데, 음악이 좋은 그는 보수를 받지 않는 일이었지만 악기를 관리하는 일을 택했다. 왕립 악단 악기 관리인이던 존 힌제스턴은 퍼셀에게 악기를 손질하는 일을 맡겼다. 머지않은 장래 퍼셀의 바램은 이루어졌다. 꾸준히 노력한 덕분에 1년도 안 되어 오르간 조율사 겸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악보 필경사로 임명되었고, 1677년 18세의 나이에 왕실 현악 합주단의 상임 작곡가가 되었다. 이때 그는 가곡과 환상곡을 작곡했는데, 특히 대위법으로 쓰인 그의 환상곡은 바로크 시대 최고의 환상곡으로 꼽힌다. 1679년 퍼셀은 존 블로의 뒤를 이어 약관의 나이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오르간 연주자 겸 작곡가가 되었다. 이 직책을 맡음으로써 퍼셀은 안정된 급료를 받으며 마음껏 창작에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 그는 성 랜스 가에 있는 사택도 함께 받았는데, 생을 마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안정된 직장을 얻은 퍼셀은 그로부터 1년 후 결혼을 했다. 프란시스는 이해심이 많은 반려자였다. 이 결혼으로 퍼셀은 6명의 자녀를 얻었으나 성장한 것은 둘 뿐이었고, 이 중 에드워드는 나중에 오르간 연주자 겸 작곡가가 되었다. 이후 몇 년 간 퍼셀은 눈부신 활동을 벌였다. 영국 왕 찰스 2세는 퍼셀에게 많은 임무를 맡겼으며,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와 윌리엄 3세, 메리 여왕도 계속해서 그에게 일을 주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르간 제작과 궁정의 악기 관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임무는 곡을 쓰는 것이었다. 그는 영국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종류의 종교의식을 비롯해 중요한 국가행사, 기념일이나 축일, 그밖의 공적인 행사에서 연주할 음악을 지속적으로 공급했다. 여기에 더해 왕실 바이올린 악단을 위한 곡도 계속 써야 했고, 늘어나는 가곡에 대한 수요도 채워야 했다. 퍼셀이 36세의 나이로 요절했음에도 그토록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때문이었다.

헨리 퍼셀의 작품활동

영국 전역에 명성을 떨쳐 물질적으로도 매우 유복했던 퍼셀은, 말하자면 국왕의 공인 음악가로서, 영국인들로부터 동시대의 제일인자로 인정되었다. 퍼셀의 걸작들도 같은 연대에 만들어졌다. 퍼셀의 작품은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 분방함을 특징으로 한다. 그는 왕실 바이올린 악단의 상임 작곡가로 일하고 있을 때 기악을 위한 환상곡을 많이 썼는데, 그의 환상곡은 오늘날까지 이 분야 최고의 명곡으로 손꼽힌다. 이 중 1680년경에 작곡한 환상곡 중 3성부 환상곡 제 1번 D단조는 모두 13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3성부를 위한 곡이 세곡, 2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의 4성부를 위한 곡이 아홉곡, 2대의 바이올린과 2대의 비올라, 첼로의 5성부를 위한 곡이 한 곡이다. 이 곡은 도리아 선법으로 작곡되었으며, 보통 빠르기로 연주한다. 화성적 감각이 뛰어난 매우 현대적인 느낌을 주며, 면밀한 대위법 기법에 충실한 울림을 담고있다. 여러 장르의 음악 중에서 퍼셀이 특히 관심을 가진 분야는 성악이었다. 그는 영국 황실 행사와 왕실 교회의 예배를 위한 합창 음악부터 극장용 음악, 오페라, 간단한 가곡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많은 성악곡을 썼다. 그의 성악곡은 자연스럽게 말하듯이 구사하는 영어 가사붙이기와 감동적인 선율,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밝고 화사한 화음과 정교한 감정표현을 특징으로 한다. 그 밖에도 극음악 작품으로는 1692년경에 작곡한 세미 오페라 <요정 여왕>이 있다.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스의 희곡 <한 여름밥의 꿈>을 바탕으로 만든것인데 중간에 전체적인 줄거리와 상관없는 춤곡 장면이 많이 삽입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밝은 느낌을 주지만 요정여왕 티타니아가 부르는 오 나를 울게 해주오 처럼 슬픈 노래도 있다. 이 아리아에는 오보에 독주가 첨가되는데, 애수를 띤 오보에 소리가 노래의 비통함을 더욱 심화시킨다. 그 밖의 작품으로 <트럼펫과 현악을 위한 소나타>, 영국 교회를 위한 예배음악 <메리 여왕의 장례>, 극음악 <오이디푸스> 등이 있다. 이외에도 50여 곡에 달하는 부수 음악과 다수의 오페라나 하프시코드를 위한 작품을 남겼다. 헨리 퍼셀은 많은 일을 동시에 하다 보니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 퍼셀은 엄청난 격무에 시달리다가 과로로 쓰러져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1695년에 3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장엄한 장례식에 참석하여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그와 인연이 깊은 파이프오르간 아래에 뭍혔다. 장례식에서는 얼마 전 메리 여왕의 장례를 위해 그가 작곡한 몇 개의 송가가 연주되었다. 감동적인 장송곡은 '주여 당신은 아시나이다' 이었으며 약 300여 년이 지난 후인 1997년 다이애나 비의 장례식에도 연주되었다. 헨리 퍼셀이 등장하기 전까지 영국은 음악의 변방국이었다. 음악의 거장들을 줄줄이 배출한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에 비해 내세울 만한 작곡가가 없었다. 퍼셀은 이런 척박한 토양에 한 줄기 빛을 비춘 작곡가였다. 퍼셀의 작품들은 주제, 불규칙한 프레이징, 박자와 리듬의 충돌 등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것들로서 왕정복고 후의 영국음악은 그의 창작에 의하여 비로소 국제적 수준에 도달하였으며 비로소 음악사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