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가🖋 - 아르칸젤로 코렐리

바로크의 빛나는 별 아르칸젤로 코렐리. 그의 합주곡은 다른 모든 형태의 음악이 들어서게 될 터전을 마련했으며, 콘체르토(협주곡)는 음악가들에게는 생명의 양식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바이올린의 근대적 주법과 작곡법을 체계화시킨 이탈리아 푸지냐노 출신의 작곡가로 바로크의 빛나는 별이 라고 불리웠다. 코렐ㄹ는 1653년 2월 17일 이탈리아의 볼로냐 부근의 작은 마을인 푸시냐노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서 충분한 교육을 받았다. 어렸을 때 피엔차에서 한 신부로부터 음악의 기초를 배우고, 13세때부터 당시 기악의 중심지였던 볼로냐에 가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조반니 밥티스타 바사니에게 대위법도 배웠다. 그는 바이올린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곧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17세 때 이미 국제적으로도 유명하던 볼로냐의 아카데미아 필하모니의 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볼로냐 바이올린 악파를 대표하는 두 음악가인 조반니 벤베누티와 레오나르도 브루뇰리에게 사사하였다. "나는 좋은 환경에서 훌륭한 선생님에게 사사를 받은 만큼 기필코 성공해야한다" 당연한 결심이지만, 코렐리는 성격적으로 상처입기가 쉽고 또 투쟁적인 측면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작은 실패에도 쉽게 낙담했다고 한다. 또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부유했지만, 그는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 옷장에는 불과 몇 벌의 옷밖에 없었고, 또한 주변에서 아무리 권해도 마차를 타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코렐리는 신분 높은 사람들의 연주 요청을 쉴 새 없이 받았지만 언제마 그들에게 공손했다. 훗날의 베토벤처럼 대등하게 맞서서 자기 과시를 하는 오만하거나 무례한 행동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는 대단한 그림 콜렉터이기도 하여 미술의 권위자로도 평가를 받았다. 1671년 경 로마로 진출한 그에게는 그의 음악적 재능에 반하여 든든한 후원자들이 계속해서 그를 밀어주게 되는데, 베네데토 팜필리 대주교나 그리고 교황 알렉산데르 8세와 같은 집안 후손으로서 이름이 같은 피에트로 오토보니 대주교들이 있었다. 이들은 그를 고용한 음악가라 생각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저택에 살게 하고 친교를 나누는 등 그에게 대해 대단히 극진한 대접을 해주었다. 카톨릭으로 개종한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도 후원자가 되었다. " 코렐리의 바이올린 연주의 핵심은 아름다운 음색, 음구의 다양함과 우아함, 느린 움직임속에 담은 풍성한 표정이 넘친다." 이 궁정에서는 음악가가 왕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코렐리는 바이올린의 명 연주자로서 또 지휘자로서, 그리고 작곡가로서 성공을 하고 있었다. 우선 1682년에 성 루이지 디 프란체지 교회의 성가대장이 된 그는, 1685년에는 작품1에서 4깢의 12곡씩의 <트리오소나타집>을 출판하였고, 1687년에는 150인이나 되는 현악주자를 모은 기념할 만한 연주회를 크리스티나 여왕을 위해 지휘했다. 같은 해에 코렐리는 팜필리 추기경의 원조를 받게 되었으며, 2년후에는 다른 추기경 피에트로 오토보니를 섬기게 되었다. 이 추기경은 교황 알렉산데르 8세의 조카이며 그 이후 평생 동안 코렐리를 도와 거쳐를 함께했다. 코렐리는 당시 가장 각광받기 시작하던 바이올린 연주 기법을 열심히 익혀서 마침내 자신만의 연주법을 완성시켰다. 현대적인 바이올린 주법들과 기법들을 고안하고 가르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바이올린 현의 데타셰나 완-급-완-급의 주제 펼침등이 그가 완성시킨것이다. 연주 양식으로서의 소나타와 통주저음의 도입, 그리고 이에 따른 트리오 소나타의 완벽한 구성, 더 나아가서는 콘체르토, 그로소(합주 협주곡)의 양식 확립에 이르기까지, 그의 뛰어난 현악기 기법을 바탕으로 하여 가장 견고하고 구조적인 것으로 집대성 시켰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기악합주 양식은 바이올린의 기량이 급격히 발전하고 다른 악기들의 기량이 어느정도 안정됨에 따라 서서히 일정한 양식을 확립해 왔다. 코렐리는 교회용과 궁정용 두 개의 소나타가 서서히 경계가 허물어지는 시기에 트리오 소나타의 연주 기법을 채용하면서 아울러 통 주저음의 개념을 확실하게 하는 4개의 <트리오 소나타집>을 내놓았는데, 연주 기법과 양식, 구조적 견고함은 과거의 전통과 현재의 최고 기교들을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모든 작곡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연주여행 등의 바쁜 일정속에서도 코렐리는 작곡과 바이올린의 양쪽에 걸쳐 뛰어난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피에트로 로카텔리와 프란체스코 제미니아니가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제자들에게 전해져서 로카텔리는 훗날 중음 연주와 카프리치오를 제미아니는 훨씬 더 복잡한 주법과 이에 관한 교본으로 잘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스승-제자 간의 관계는 니콜로 파가니니를 거쳐 파블로 사라사테에 이르기까지 기교적 유파이자 동시에 현대적인 바이올린의 연주 중심의 계보를 만들어냈다.
✔️코렐리의 주요 업적
이탈리아의 음악사에서 지극히 예외적인 사실로 코렐리는 성악을 위한 작품을 전혀 작곡하지 않았다. 각각 12곡으로 이루어진 op.1에서 6까지의 코렐리의 전 작품에는 오페라와 종교곡조차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음악사에서 그의 최대의 공적은 합주 협주곡의 형식을 확립한 점이지만, 트리오 소나타와 바이올린 소나타도 그와 더불어 하나의 완성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기품이 넘치는 선율의 우미함과 균형이 잘 잡힌 형식감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새로운 기법을 창안해 낸 혁명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양식의 완성을 가져다 준 고전적인 예술가로서 더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탈리아의 제미니아니, 비발디, 로카텔리를 비롯하여 바흐와 헨델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대의 음악 평론가 로저 노드는 저서 <음악 회상기>에서 코렐리의 빛나는 업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코렐리의 합주곡은 다른 모든 형태의 음악이 들어서게 될 터전을 마련했으며, 콘체르토는 음악가들에게는 생명의 양식이었다."
코렐리의 영광은 은퇴하는 1708년까지 빛을 잃지 않았다. 이 1708년은 중요한 해로서 이 해에 그는 헨델과 알게 되었고 헨델의 오라토리오 지휘를 했다. 알렉산드로 스카를라티와도 만났다 1708년 코렐리는 그다지 성공했다고 할 수 없는 나폴리로의 연주여행을 하면서 위궤양을 앓게 되었으며 로마에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작품 이외의 작품은 가령 자신을 위해서 작곡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작품을 직접 연주하는 것만큼 잘 해내지 못한 것 같았고, 나폴리에서는 스카를라티 작품의 어려운 곳을 잘못 연주하였다. 이런 실패로 인해서 낙담했으며 얼마 후에는 은퇴하였고 공중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코렐리가 60세가 되던 해에 사망했을 당시에는 12곡으로 이루어진 <콘체르토 그로소집>의 출판 계획이 다른 사람들의 소네 의해서 인쇄 출판되어 실현을 보았다. 또 미술품을 크게 애호한 코렐리는 귀중한 그림의 수집품들을 오토보니 추기경에게 증정하도록 유언했고, 추기경은 답례로 코렐리의 묘비를 로마 판테온의 라파엘 묘의 곁에 세웠으며, 이 묘비에 새겨진 라덴부르그 후작이란 칭호는 어떤 작품을 헌정한 답례로써 파라티나선 제후 필립 빌헬름이 코렐리에게 내린 것이다.